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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부활을 가로막는 불운

재능세공사 2009. 4. 20. 13:59

박찬호 5선발 진입의 의미

 

몇년간의 부상과 부진으로 천상 선발체질이었던 박찬호에게 5선발 기회가 주어진 올 시즌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작년 다저스에서의 부활 전주곡은 우리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기에 충분했고 디펜딩 챔피언 필리스로의 이적은 최상의 선택으로 여겨졌다. 물론 전성기가 한참 지나 다시 재기를 꿈꾸는 박찬호같은 노장(아직도 이 표현이 익숙하지 않다)투수에게 선발진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상의 시범경기 성적을 올렸지만 언론과 코칭스태프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그는 최종 순간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박찬호가 5선발 자리(선발투수에게는 가장 불안한 자리)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나와 같은 박찬호 올드팬들은 기쁘기 그지 없었다. 적어도 최근 몇년처럼 한 경기 부진만으로 그가 홀대당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출전기회의 부여다. MLB 중계부재로 그의 첫 등판을 생중계로 볼 수 없었지만 전체 선발투수진의 붕괴와 그의 부진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메츠와 다저스 시절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두번째 등판이야말로 국내 팬들 앞에서 박찬호 스스로 부활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일전이었고 다행히 경인방송을 통해 그의 투구를 지켜볼 수 있었다. 포털은 그가 교체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성의없는 제목으로 그가 부진한 투구끝에 교체됐다고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오늘 경기를 좀 더 자세하게 복기해 보자.

 

 

박찬호의 부활을 가로막는 불운

 

경기가 시작되기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은 상대팀이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고 급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샌디에고라는 점과 소속팀의 최근 성적부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 초반부터 양팀은 최근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박찬호에게 이중고를 안겨준다. 

 

상대 선발투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조시 기어였고 1회초를 삼자범퇴로 산뜻하게 출발한 박찬호였기에 한껏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힘든 경기를 펼칠 때마다 여지없이 등장하는 불운은 아직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2회초에 처음 찾아온 위기도 빗맞은 안타로부터 시작됐다. 다행히 후속타자의 잘맞은 타구가 라인 드라이브가 되면서 병살타로 연결되면서 박찬호는 첫번째 위기를 넘긴다.

 

필리스 타자들이 조시 기어의 안 좋은 볼들에 쉽게 말려들면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운명의 3회초. 선두타자 카브레라의 기습번트가 안타가 되고 희생번트로 1사 2루 상황. 다음 타자에게 높게 제구된 볼을 던지다가 또 한번의 빗맞은 안타를 허용하면서 첫번째 실점.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상황은 말 그대로 불운의 망령의 시작.

 

현재까지 팀에러 수에서 2위를 차지할만큼 좋은 수비력을 보여주던 필리스였지만 후속타자의 단타성 타구를 좌익수 이바네즈가 무리해서 잡으려다가 뒤로 흘려보내면서 실책성 3루타로 두번째 실점은 가뜩이나 예민한 박찬호를 맥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2루땅볼로 3번째 실점은 허용하자 눈에 띄게 박찬호의 투구의욕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팀동료들의 방망이는 뜨거워지기는커녕 연신 무기력하게 돌아가기 급급했고 다시 맞이한 4회초. 최소한 6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투구수 절감이 필요했던 시점. 두번째 타자까지 빠른 투구수안에 투아웃을 잡을때만 해도 승리까지는 몰라도 퀄리티 스타트에 대한 희망은 가질 수 있었는데 연속안타로 2사 1,2루로 다시 투구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 다음 타자는 투수 조시 기어였지만 제구가 안되면서 볼넷을 허용하는 최악의 위기. 다행히 2루수 땅볼을 유도하면서 불을 껐지만 투구수 증가로 퀄리티 스타트는 이미 물건너간 분위기였고 감독이나 홈팬들에게도 미덥지 못한 인상을 남기고 만다.

 

위기극복에 대한 안도감이었을까. 5회초 선두타자를 루킹삼진으로 솎아내면서 기세를 올리던 박찬호는 아드리안 곤잘레스에게 변화구 두개를 연속으로 구사하다가 홈런을 허용하면서 통한의 추가점수를 내준다. 후속 두타자를 범타로 돌려세우고 선발투수로서 최소한의 임무인 5이닝을 버텨냈지만 언제든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는 5선발로서는 위험한 경기내용이 아닐 수 없다.

 

 

박찬호 선발시 불운 징크스 몇가지

 

박찬호가 붙박이 선발에서 밀려난 이후 어렵게 잡아낸 선발기회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몇가지 불운 징크스가 있는데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번째는 야수들의 결정적(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실책이고 두번째는 동료타자들의 물방망이화다. 마지막 하나가 박찬호가 교체된 후 기다렸다는 듯이 뒤늦게 발동하는 타선폭발인데 다들 결과를 아시겠지만 아주 불운징크스 교과서로 불려도 좋을만큼 골고루 조건을 갖춘 경기였던 셈이다. 

 

내가 이렇게 불운징크스 운운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박찬호같이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선수에게 행운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운 정도는 없어야 자신감도 얻고 기회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동국이 데뷔전에서 골대를 맞힌게 아니라 골이 되었더라면 그의 프리미어리그 생활은 엄청난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혹평일색의 암울한 터널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박찬호에게 있어 시즌 시작과 함께 부여받은 서너번의 선발등판은 올시즌 농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경기인만큼 '불운이여 조금만 기둘려다오'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팀은 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어 패전투수를 면했지만 호시탐탐 박찬호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제이햅이 비교되는 투구내용으로 점수를 쌓았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다행히 필리스 감독이 다음 등판까지는 믿어보기로 결정을 한거 같은데 마지막 선발등판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다음등판 상대 역시 올시즌 돌풍을 일으키며 최고승률을 구가하는 플로리다. 어쩌겠는가. 불운이 제발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실력이라는 '굿'으로 내쫓을 수 밖에..ㅜㅜ

 

 

실력외에는 믿을게 없다

 

박찬호의 불같은 강속구는 이제 한 경기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껴서 써먹어야 할 제한된 무기가 되었다. 살아남는 길은 더 정확한 제구력과 경험에서 나오는 수싸움인데 첫번째 등판보다는 여러모로 좋아졌지만 풀타임 선발 도장을 받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샌디에고 타선이 짜증날 정도로 볼을 잘 골라내고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궁합도 안맞긴 했지만 조금 더 섹시한 유인구를 구사하지 못하니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 놓고도 끌려가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볼넷이 거의 없었다는 점,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점차 제구력과 스피드가 살아나고 있다는 점, 필리스 감독의 인내심이 예상보다는 강하다는 점 등의 희망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살려 플로리다전에서 최소한 퀄리티 스타트를 목표로 달려가 보자. 박찬호는 해낼 것이다. 만에 하나 5선발 자리를 뺏긴다 해도 그의 올시즌이 불펜에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실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부활의 시나리오를 시작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박찬호 화이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