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토피아

셀프 오마주의 위력 - 강철중

재능세공사 2008. 6. 21. 03:41

공공의 적 매니아 연대기

 

공공의 적을 처음 보게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반복적이고 짜증스런 일상에 지쳐 아무 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영화 한편 보겠다는 일념하에 낙찰되었던 이 영화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무난한 성공작에 속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공중파건 케이블이건 이 영화가 틀어지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복습하는 즐거운 노예가 되었다.

 

왜 나는 이 영화에 중독되었을까? 개인적으로 그 일등공신은 사안수와 칼잡이 용만이라는 캐릭터다. 공공의 적에서 이들은 강철중의 기준에 의하면 기냥 나쁜놈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설프고 귀여운 나쁜놈들이다. 이들이 강철중과 벌이는 공공의적에서의 에피소드들은 언제고 다시 봐도 웃음을 선물하는 최고의 것들이다. 사안수가 취조를 당하며 도라이버를 들고 뻘쭘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과 칼잡이 용만이 칼잡이로서의 본능과 전문가다운 칼부림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비록 조연급 캐릭터들에게 밀리는 내상을 입긴했지만 강철중 역시 기나긴 세월을 넘어 다시 부활할만큼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골때리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이 그러한것처럼 설경구가 분하지 않은 강철중은 상상할 수 조차 없지 않을 정도다. 이 캐릭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으로서의 관대함은 커녕 사사로운 감정이 자극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의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무대뽀로 지 성질이 풀릴때까지 미친듯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영화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 시리즈에서는 악역 캐릭터 역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들이 얼마만큼 악랄한 포스를 발휘하느냐에 따라 강철중 캐릭터가 사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성재는 아메리카 사이코를 연상시킬만큼의 한국형 사이코 킬러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정준호는 배때지에 기름 좔좔 흐르는 기득권 세력의 화신으로서 진정한 공공의 적으로서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더불어 이 시리즈의 진정한 힘은 각 캐릭터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감칠맛나는 대사의 향연이다. 요즘 각종 어록시리즈가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지만 이 시리즈에서 강철중이 뱉어내는 '형이..'어록과 공공의 적 2편에서 쏟아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빗대는 어록들은 가히 레전드라 불릴만 하다. 물론 나같은 매니아들만의 기준일테지만..^^

 

 

셀프 오마주의 위력

 

공공의 적 속편은 강우석의 솔직한 의사표명처럼 냉정하게 말하면 매우 급조된 유사 공공의 적 시리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라는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강철중과 엄반장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위협적인 공공의 적과 맞짱을 뜨는 독자적인 이야기의 재미와 공공의 적 시리즈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만으로도 가뿐하게 중박이상을 쳐주었으니 썩어도 준치라 불릴만 하다. 정준호는 의외의 캐스팅이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왕자삘 이미지에 거만함과 교활함이 잘 믹스된 야비한 공공의 적으로 분해서 이 유사 속편을 살리는데 공헌했다.

 

강우석 감독은 안전하고도 적절한 선택을 했다. 공공의 적 1편에 대한 셀프 오마주로 승부한다는 전략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거의 모든 전편의 캐릭터들을 들추어 내고 이들로 하여금 전편의 즐거운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는데 몰두하게 한다. 전편의 향수에 취해 있는 나같은 매니아 층에게 영화 강철중은 그래서 더 재미있고 므훗할 수 밖에 없다. 셀프 오마주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시간비중과 상관없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짧지만 강렬한 셀프 오마주의 위력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이 영화를 대하는 공공의 적 시리즈 신참 관객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이다.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셀프 오마주의 흔적을 살짝 디벼보자. 아마도 영화 강철중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은 사안수와 용만이 보여주는 후천성 강철중 깨갱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용만이 국과수 부검실에서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공공의적 1편의 취조실씬과 부검씬을 일타쌍피로 요리하는 내공을 보여준다. 용만이 강철중의 겁많음을 약올리다가 절묘한 타이밍에서 강철중의 의도한 삑사리때문에 내상을 입는 장면에서는 즐거운 데자뷰를 경험하게 된다.

 

이외에도 아기자기한 셀프 오마주가 많다. 강철중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글씨체와 사표 장면이 그렇고 강철중이 칼로 다구리를 당하는 것, 공공의 적 가정으로 침투해 약올리는 것, 최후의 결투 장소 역시 살짝 변주가 있지마 이성재에게 밀가루를 뿌리던 그 장소 역시 똑같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철중때문에 항상 엄반장에게 깨지는 김형사 캐릭터는 그 와중에 강철중 따라하기를 시도하는 개그를 선보이기도 한다.

 

사안수는 셀프 오마주와는 상관없이 역시 업그레이드된 내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가 강철중의 처지를 눈치채고 울럼증을 극복하고 굴복의 미덕을 강철중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모습은 매우 재미있다. 특히 강철중 딸의 한마디를 들어보고는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를 날려준다. "강철중 딸 맞구만"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이 시리즈에서 사안수는 최후까지 살아남는 캐릭터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철중이 부드러워졌다거나 약해졌다고 평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강철중은 단지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을뿐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불량학생 출신의 성질 더럽고 게으르며 충동적이며 살짝 야비하기까지한 전편 그대로의 캐릭터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일일교사로 등장한 강철중의 통제되지 않는 성질은 보라. 그는 여전히 형이~화법을 쓰고 있고 사안수와 용만을 개처럼 부리고 엄반장한테 졸라게 개긴다. 지 뜻대로 대출이 안된다고 은행에서 깽판치는 강철중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장진의 공로

 

셀프 오마주가 아무리 위력적이라 하더라도 장진의 가세가 없었다면 강우석 감독은 더 이상 이 시리즈를 이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장진은 그만의 색깔을 가지고 강우석이 요구한 셀프 오마주의 적절한 변주를 가능케 했고 이전까지와는 매우 다른 공공의 적 캐릭터를 창조해냈으니 말이다. 장진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정재영은 그래서 당연한 선택일 수 밖에 없다.

 

이원술은 진화된 조폭의 상징이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일견 미화된 듯한 인상도 있지만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그의 행보는 그 자신의 표현 그대로 완전무결한 실전깡패다. 여러장면을 통해 이원술을 엿먹이는 변호사 캐릭터는 절대 충성만을 진부하게 보여주었던 여타의 조폭영화 부하 캐릭터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다. 이원술이 태생적 깡패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는 평범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1편에서의 이성재를 연상시킨다. 다만 이원술의 아내(굿 캐스팅이다)가 훨씬 현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강철중과 이원술 사이에서 희생양으로 등장하는 조폭 연수생들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 아닐까. 게다가 장진은 일일교사씬에서 초등생들의 경찰과 조폭에 대한 정서를 복선으로 깔면서 조폭 연수생들이 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내던지는지 암시하는 내공을 선보인다. 그들이 조폭 연수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은 여린 감성을 가진 아이들일 수 밖에 없음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안배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 장진의 힘을 보여준다.

 

정말 오랫만에 스크린에서 문성근의 모습을 보게된 것은 또 다른 행운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여전히 문성근의 포스는 인상적이었고 그와 더불어 최고의 신참 캐릭터인 강철중의 딸은 여러모로 관객을 웃겨준다. 아빠 강철중을 어찌나 잘 아는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하게 지나칠 정도로 어른스럽게 아빠 강철중을 달랜다. 이렇게 쿨한 아역 캐릭터 역시 장진의 머리속에서 나와을께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강철중과 이원술이 가족농장에서 초딩급 싸움을 펼치고 돌아가면서 아들 딸들의 한마디에 스팀올라가는 장면이야말로 장진식 시나리오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초딩급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 알려주는 단순명쾌한 기준을 활용한 이 명장면이 다음 시리즈에서 또 어떻게 변주될지 정말 기대만빵이다. 강우석과 장진의 콤비가 이 시리즈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