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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마인드 박찬호 절반의 귀환

재능세공사 2008. 4. 9. 01:25

드디어 박찬호가 돌아왔다. 약 11개월전 그의 불운에 마음으로 같이 울었던 나에게 오늘 벌어졌던 애리조나와의 1년만의 복귀전은 수많은 메이저리그 경기 중 하나일 수가 결단코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선발투수가 아닌 선수의 경기를 미리 예측하고 시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엑스포츠가 다저스 경기를 중심으로 중계를 해주며 박찬호의 등판을 학수고대하는 마음 그대로 나 역시 그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오늘 드디어 얄굽게도 시범경기 내내 그와 5선발 경쟁을 펼쳤던 로아이자의 뒤를 이어 두번째 투수로 박찬호가 마운드에 서게된 것이다.

 

 

캐스터의 목소리에 흥분된 열정이 담기고 해설자는 신이 났다. 내 마음이 그랬다. 그도 속으로 얼마나 수많은 감정이 뒤엉키지 않았겠는가. 팀이 4:1로 뒤지고 있는 상황. 예전 로아이자에게는 좀처럼 감수할 수 없는 5회 이전의 강판. 여전히 5선발 경쟁이 묵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경쟁자를 구원한 상황. 여러가지로 의미가 담긴 등판이었고 박찬호는 1년간 마이너리그 밥(햄버거라고 해야 하나)을 먹어가며 참고 기다려왔던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등판일 수 밖에 없었다.

 

11개월전 메츠에서 있었던 단 한차례의 기회를 살리지 못해 선수생명까지 위협받았던 그에게 오늘 등판은 기분나뿐 데자뷰를 떠올릴 수도 있는 경기가 아니었을까. 내심 그를 응원하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미 코리언 메이저리거로서 많은걸 이룬 그대 아닌가. 이제 세속적인 성적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그대가 10년 이상을 혼신을 다해 열정을 불살렀던 이 무대에서 즐기는 기분으로 멋진 뒷풀이에 참석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있게 던지라고 말이다.

 

나를 비롯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응원하는 팬들의 함성을 그가 들은것일까. 비록 투수이긴 했지만 시범경기보다 더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삼진으로 복귀후 첫타자를 작업하는 박찬호. 나도 모르게 인민군처럼 박수를 연신 처대고 있었다. 그러나 캐스터 말대로 다음 타자부터가 진짜 승부의 시작. 톱타자 크리스 영의 타구가 좌익수 방향으로 날아가는 순간 기겁을 했는데 다행히 약간 빗맞아서 플라이아웃이 되고 다음타자 번스의 잘 맞은 타구가 3루수 직선아웃으로 처리되는걸 보고 1년전에 그를 괴롭혔던 불운은 더이상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6회 들어서도 두 타자를 플라이로 요리할때만해도 첫 등판부터 그가 일을 내는구나 했는데 이날 크레이지 모드 기운이 농후해 보였던 레이놀즈에게 우측펜스를 살짝 넘기는 홈런을 허용하면서 박찬호의 시련은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홈런 후유증의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 볼카운트가 몰린끝에 중전안타를 내주고 다음타자에게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2루타를 허용하자 조토레 감독은 고의사구 지시 후 얄짤없이 박찬호를 강판시킨 것이다. 2이닝을 깔끔하게 매조지하고 진짜 5선발이 여기있소라고 위력시위를 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졸지에 추가실점과 위기상황을 자초하며 강판되는 그저그런 불펜투수로 처지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러나 오늘 그의 경기를 보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박찬호의 달라진 마음자세였다. 이미 시범경기에서 그의 피지컬은 이미 충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베테랑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그에게 배어있었던 소심모드(긍정적인 표현으로는 노련미라고 말해왔지만)가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루키마인드로 변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오늘 박찬호는 겁없이 던졌다. 무브먼트가 전성기 시절보다 떨어져도, 타고난 컨트롤 아티스트가 아니었던 그이기에 면도날 같은 정확한 로케이션이 되지 않아도, 그를 5년 연속 10승 투수로 만들어주는데 크게 공헌한 위력적인 슬로커브를 던지지 않아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씩씩하게 직구 위주의 피칭을 했고 많은 투수들이 여전히 두려워한다는 타자 몸쪽 승부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오늘 모습만으로만 보면 그는 전형적인 메이저리그 루키였던 것이다. 몸쪽 승부가 가운데로 쏠려 홈런을 맞고 묵직함이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구질때문에 쓴맛도 보았지만 그는 공격적으로 타자와 맞섰다.

 

 

조토레 감독이라면 이런 점을 분명 평가해 줄 것으로 믿고 싶다. 언제가 은퇴시기가 될지도 모를 박찬호와 같은 투수가 정말 막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시점은 상황과 상관없이 타자들이 두렵게 여겨지기 시작하는 때라고 한다. 노련미나 운으로 잠깐동안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루키같은 자세로 최선을 다해 타자들과 당차게 맞서는 마인드를 유지하는게 아닐까. 여전히 박찬호에게 몇가지 행운(감독운, 경쟁선수의 부진, 이른 시점에서의 선발기회 등)이 따라주어야겠지만 그 기회가 왔을때 오늘 보여준 그의 루키마인드는 분명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가 올시즌의 성공적 연착륙을 통해 몇년 정도 더 메이저리그에서 우리를 기쁘게 해줄 것을 마음을 담아 기대하는 바이다. 찬호 앞날에 광영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