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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과 축구대표팀이 사는 길

재능세공사 2008. 8. 14. 04:02

2002년 월드컵 신화 이전으로의 회귀

 

부질없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역시 현실은 냉정했다. 올림픽 8강 탈락이 확정되면서 느낀 첫번째 단상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위상이 2002년 월드컵 신화 이전으로 확실히 회귀했음을 인정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벌써 6년동안이나 그 달콤한 신화를 잊지 못하고 언제고 다시 한번 대표팀이 화려하게 비상할 것이라고 최면을 걸어왔다. 아시안게임, 아시안컵, 또 한번의 월드컵 그리고 이번 올림픽까지 얼마나 많은 기대와 실망과 비난을 반복해 왔던가. 맨유 박지성이 누리고 있는 인기의 한 축에 월드컵 신화를 잊지 못하는 국민정서가 깔려 있다면 과장일까. 

 

 

살얼음을 밟는듯 했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과정과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예선탈락을 냉정하게 들여다 보면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골결정력 부재, 허약한 수비, 개인기 취약 등의 고질병은 물론 히딩크를 통해 놀랄만한 진전을 이루었던 강철같은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이라는 강점조차 잃어버린 축구강국과는 거리가 먼 변방국가로 다시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축구천재라 불리우던 박주영의 현주소

 

청소년 대표시절의 박주영은 '축구천재'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대단한 선수였다. 중국전에서 보여준 페널티박스 안에서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침착한 슈팅력, 팀을 정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멋진 프리킥 골을 터뜨리던 그의 모습은 우리를 열광케 하기에 충분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성인대표팀 발탁과 2006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의 활약까지 그는 우리의 기대만큼 착실히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FC서울은 박주영은 보유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우승후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고 K리그에 데뷔한 박주영의 초반활약은 그의 명성에 걸맞는 것이었다. 2006년 월드컵은 박주영에게 잊을 수 없는 대회다. 한국축구의 미래보다는 2회 연속 16강 진출이라는 눈앞의 성적을 더 중시했던 아드보카트 체제에서 박주영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의 경험을 착실히 쌓기는커녕 가장 긴장감이 높을 수 밖에 없었던 스위스와의 최종전에 투입돼 결승골의 빌미가 된 파울 제공자라는 최악의 경험만 쌓고 돌아오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부터 박주영은 퇴보하기 시작했다.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부상의 악령이 찾아들기도 했고 청소년 대표시절이나 아시아권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던 상대적으로 취약한 피지컬도 성인무대와 터프한 수비수가 즐비한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런 악재들이 겹치면서 박주영은 킬러로서의 자신감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고 축구천재라는 별명을 의심받게 된다. 그를 그 위치에 제 맘대로 올려 놓았던 찌라시언론들과 국민들에 의해서 말이다.

 

 

올림픽 예선전에서 확인한 박주영의 빛과 그림자

 

오랜 부상공백에서 K리그에 복귀한 박주영은 인기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실력에서는 더이상 특A급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축구대표팀 안에서의 그의 위상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네임밸류를 가진 에이스였고 실제로도 상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다른 공격수에 비해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박주영의 이 정도 활약만으로 올림픽 대표팀의 8강을 견인하기에는 무리였고 그렇게 축구천재는 또 한번 고개를 숙이고 귀국길에 올라야 한다. 이번 대회에서 확인한 박주영의 쓰임새는 우리가 바라는 대형공격수가 아니라 날카로운 세트플레이어이자 골게터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특급도우미가 아닐까. 이런 역할이라면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 축구의 미래에 여전히 중요한 전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마지막 패스의 정확도를 높이고 그의 최대 약점인 피지컬의 보완이 이루어진다는 전제에서. 무엇보다 더이상 국가 대표팀의 간판공격수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져야 한다. 팀의 승리를 위한 자신감 넘치는 조연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새로운 위치에서의 경험과 노력이 자연스럽게 쌓여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축구천재의 부활을 언젠가 조금은 다른 형태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Again 2002를 위한 평범한 축구팬의 조언

 

첫째, 더이상 관행적인 틀에 머물러 있는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겨서는 안된다. 해외파 감독을 무조건 영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국내 지도자들이 이런 관성에 더 젖어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허정무, 박성화 감독에게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축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매니아들에게 자문을 구해라. 이 과정에서 선임한 감독에게는 2014년 월드컵을 목표로 팀을 리빌딩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전권을 부여했으면 좋겠다. 국내파 젊은 감독중에서 싹수있는 코치진을 선임하고 차기감독 후보군으로 장기적으로 양성하는 것도 좋겠다.

 

 

현재 수비라인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김진규와 강민수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강팀 수비수들에 비해 개인기와 수비수로서의 센스(거칠고 단호하게 끊을때와 영리하고 차분하게 수비영역을 지키거나 공격수의 플레이를 지연시켜야 할 때를 구분하는 능력)면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대표팀에 발탁된 기간에 비해 발전속도가 너무나 더디다는 면에서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양쪽 사이드에는 경쟁시켜볼 자원이 많은만큼 중앙수비수 대체자원의 발굴이 최우선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대표팀의 색깔을 그 어떤 팀보다 공격적으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다.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라는 이유로 더이상 수세적이고 안전위주의 전술을 택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어느 팀이건 우리 팀의 공격지향성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그런 팀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상적인 포진으로 싸웠으면 좋겠다. 이런 팀컬러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장기적인 투자의 열매는 단기적인 성적에 연연하며 반복적인 실망만을 되풀이하는 지금의 현실보다 훨씬 달콤할 것이다.

 

문득 김재범 선수의 결승전이 끝날 무렵 해설자로 나선 이원희 선수의 말이 떠오른다. "연장전 불패의 체력과 어떤 공격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재능을 가졌지만 올림픽이라는 최고수준의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한판으로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매번 예선통과를 위한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약팀과 한조가 될 것을 기대하며 조추첨에 호들갑을 떨고, 예선통과의 열쇠가 가장 센팀에게 패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당연한듯이 읖조리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원희 선수의 말을 다음과 같은 축구버전으로 귀가 따갑게 듣게될 것이다.

 

"조주첨의 행운이나 운좋게 강팀과 비기는 것으로 본선이나 16강 진출의 행운을 아주 간헐적으로 맞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월드컵이라는 최고수준의 대회에서 진정한 축구강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어떤 팀과도 공격력으로 정면으로 맞서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