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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최종회, 반전없는 피날레가 더 좋았던 이유

재능세공사 2010. 12. 8. 06:36

반전을 위한 피날레는 없었다


드디어 무려 30주 동안 계속된 자이언트가 막을 내렸다. 몇 번이고 다른 드라마에서 소재로 삼았던 시대배경이나 이야기 구조를 가졌음에도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캐릭터 형성과 이야기 얼개의 힘이 폭발하기 시작하면서 기세등등하던 경쟁극 동이를 제침은 물론 폭넓은 매니아 시청자를 양산해 내기도 했다. 


특히나 10부 연장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주간은 어떤 피날레를 보여줄지, 그리고 드라마 진행 내내 아기자기하게 보여 주었던 반전과 트릭을 극적으로 매조지 할 충격적 반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문화연예 블로거들의 다양한 하마평을 이끌어 내는 힘을 보여 주었다.



최종회를 시청하신 분들은 이미 알고 있듯이 진짜 충격적이거나 예상 밖 반전은 없었다. 이리 저리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봤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웠을게 틀림없지만 나에게는 다른 측면에서 기대 이상으로 의미를 곱씹어 볼만한, 그윽한 여운이 남는 피날레였다. 어떤 점에서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 차근차근 얘기해 보겠지만 우선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자이언트는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을 진행하는 내내 다양한 에피소드의 발생과 해결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호기심 유발, 긴장감 조성, 절묘한 주인공들의 위기탈출과 머리싸움, 선과악의 널뛰기 승부 등을 배가 터질만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최종회마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억지스럽게 충격적인 반전을 꾀하려 했다면 드라마 자이언트는 딱 그 정도 수준으로만 시청자들에게 기억되며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피날레를 통해 꼭 들려주어야 했던 이야기와 결말

 

최종회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도 제작진은 시청자들의 궁금증에 아랑곳 하지 않고 거의 쉬어가는 여유를 보여주다가 최종회 예고편에 대한 야릇한 편집을 통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최고조로 올려 놓았다. 특히 뜻밖의 죽음을 당하는 이는 누구일까를 최후의 관전포인트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확연히 보였다. 이런 한시적인 쏠림현상에도 불구하고 자이언트를 오랫동안 시청해 왔던 이들이라면 최종회에서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물론 필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조필연을 필두로 한 악인들의 최후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자이언트에는 꼭 심판받아야 할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중 심판이 완결되지 않은 중심인물들은 조필연 부자와 고재춘 정도다. 이미 댓가를 치른 인물 중 으뜸은 황태섭과 오병탁이다. 황태섭 역시 원죄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만보건설을 빼앗기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으며 조강지처와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건  스스로의 행동을 뉘우치고 진심어린 사죄와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었을게다.



반면에 오병탁 의원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주인공들의 편에 서있거나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졌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그릇된 국가관으로 절대악 조필연을 키우고 그의 악행을 방조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민홍기 의원 역시 같은 특성을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조필연과 대척점에 서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의 대상이 아닌 심판자의 대열에 포함된 것은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조필연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인물이 아니다. 누가 되었든 그를 죽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단죄가 아니라 필패의 길이다. 조필연이 그토록 갈망했던 최상의 권력에서 그를 끌어내리고 망신주고 감옥에 처넣는 것 또한 완전한 심판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여러차례 그런 유사한 상황에 몰려도 비웃음으로 적들을 조롱하던 조필연이 아니던가. 그만큼 설득력있고 공감가는 최후를 선물하기가 어려운 인간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은신하던 별장에서 조필연을 체포했을 때와 고층빌딩으로 강모를 죽이러 탈출한 조필연과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주인공 강모와 나눈 대화를 통한 마무리는 피날레의 하이라이트로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하다. 못보신 분들이나 다시 음미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그들이 펼친 최후의 대결을 살짝 리플레이 해보자.



#경찰에 연행되는 조필연과 이강모의 대화


조필연 : (강모를 비웃으며) 뭐야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강모 :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난 당신따윌 이길 생각 같은거 애초부터 없었어. 처음부터 내 상대는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조필연 당신같은 인간이 잘 사는 세상, 내가 이기고 싶었던건 바로 그 더럽고 악랄한 세상이었어. 나한테 당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제 세상을 아주 조금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당신이 비참하게 파멸해줘서.


조필연 :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강모의 행동이나 말보다 그를 동요시킨게 분명해 보인다. 그가 억지로 짜내는 듯한 비웃음이 참 공허하게 들렸으니까)



#마지막 발악을 하는 조필연의 도발과 강모의 대응


조필연 : (이강모를 죽이는 것보다 자신을 죽이게 하는게 최후의 일격임을 알고 도발하는 조필연) 살인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 용기가 있다면 나를 죽이고 니 아버지의 복수를 해봐. 쏴 보라구.


이강모 : (언제나 조필연의 의도를 간파하고 예상밖의 대응을 보여주는 이강모) 내 손에 당신의 더러운 피를 묻히라구. 당신이야말로 용기가 있다면 여기서 뛰어내려. 이 땅이야말로 당신의 목숨을 받아줄만 곳 아닌가.


조필연은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낙마한다. 여전히 권토중래를 꿈꿔 보지만 허망함이 가득하다. 믿었던 자식의 파멸과 무기징역을 얻도 받고 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조필연에게 남은 승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이강모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는 것 뿐이다. 이강모는 알고 있었다. 오로지 눈앞에 적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며 승리자라고 믿어왔던 조필연의 삶 자체를 무의미하고 존재감 없는 것으로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임을.


조필연은 이강모의 손으로 자신을 처단하길 원했지만 자신이 철썩같이 믿고 있던 존재감을 본질적으로 부정해버린 이강모의 최후의 일격에 한평생 그의 욕망을 투사했던 강남땅의 품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도 이강모에게 진 것이 아니라 더 악랄하고 철저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단죄를 내린 것으로 믿지 않았을까.


조민우는 아버지 조필연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과 폭압적이며 교묘한 영향력에서 끊임없이 탈출하고자 했던 그였지만 아주 어릴적부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승리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아버지의 방식에 물들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가진 인물이다.



미주와의 사랑은 조민우에게 항거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 동시에 감정의 비틀림이 증폭됐을 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악마적 본능을 더욱 끌어 올리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만보플라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조민우를 구원한다.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미주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고 최후까지 욕망을 놓지 않는 아버지를 유일하게 멈추게 할 선택으로 그를 이끌어 주었으니까.


그의 자의식은 미주를 목숨걸고 구해내고, 이강모에게 아버지의 은신처를 알려주고 용서를 비는 것 만으로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용서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게 만든다. 자살 일보 직전에서 조민우를 미주의 품으로 돌려준 것은 그의 또 다른 핏줄의 힘이다. 절대악의 화신 아버지의 피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진실된 사랑을 느꼈던 우주가 자신의 핏줄임을 확인한 순간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고재춘도 일관성만으로만 보면 조필연급 인물이다. 이성모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조필연의 명령이나 행동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사실 조필연이 이성모에게 보여준 남다른 애착이 원래 향해야 할 대상은 고재춘이었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조필연은 자식에게 조차 표현하지 않았던 인간적인 고마움을 자신곁을 끝까지 지킨 고재춘에게 내비친다. 그걸로 족했을까. 고재춘은 평생 주군으로 모셨던 조필연의 허망한 몸부림을 뒤로한채 자결을 택한다. 그다운 최후다.



파란만장한 삶을 걸어온 세 남매의 운명은?


이강모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일과 사랑 모두에서 그는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형 성모의 희생의 바탕위에서 가능했다는 것을 알기에 가슴이 시리고 한없이 미안하다. 미주를 찾았을 때도 마지막 순간 준모까지 찾아왔을 때도 이강모는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던 동생들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때문에 더 짠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미주와 민우의 재결합은 두 집안 사이의 오래된 은원과 작별하고 희망적인 미래를 여는 상징성을 갖는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의 열쇠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반면 이성모는 철천지 원수 조필연에게 복수한다는 일념만으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힘으로써 불행한 운명을 예정해 왔고 결국 조필연을 파멸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성공하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동생들을 불행과 위험으로부터 막아주고 행복한 모습을 확인하고 죽을 수 있어서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이 참 좋다. 세 남매가 함께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개발전의 강남땅. 그 순간이야말로 세 남매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가장 편하게 행복을 만끽한 시간이었을테니까. 만약 세 남매가 복수나 야망같은건 다 놓아버리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보통사람의 삶을 선택했다면 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준모까지 더해진 네 남매의 행복한 가족사진을 보지 못하게 된게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