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토피아

또 한명의 영화계 타짜 등장 - 과속스캔들

재능세공사 2009. 1. 18. 16:25

넉달만에 본 영화가 대박감이라니..^^

 

솔직히 요즘 같아서야 나름 영화 매니아로 자부하던 호기로움은 귀차니즘과 엿바꿔 먹은 상태임을 이실직고해야할 듯 싶다. 당췌 이유를 알 수 없다. 영화보기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영화 한편 볼 수 없을만큼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영화 한편 보지 못할 정도로 땡전한푼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귀차니즘과 재능세공사로 거듭나는 일에 살짝 미쳐 있느라 꽤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애인 노릇하던 영화양(?)에게 잠시 소홀했던 것이라는 어줍잖은 답이 나온다..^^

 

 

과속스캔들의 예고편을 살짝 본 적이 있다. 속으로 이랬다. 또 하나의 쓰레기 같은 영화가 더해지는구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의 어처구니 없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과속스캔들의 흥행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순간 떠오른 영화 몇 편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쉬리'와 '두사부일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영화들도 나의 근거없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관람하고는 겸허하게 꼬리를 내릴만큼 예상을 뒤엎는 포스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에 대한 기억 덕분인지 나는 과속스캔들의 품질에 대한 나의 헛발질을 더이상 당황하거나 노여워하기는커녕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명의 영화계 타짜의 등장 - 한국영화의 위기란 없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지만 한국영화의 위기가 거론될때마다 구원자로 나선 이들은 공교롭게도 기존 영화계의 검증받은 감독이 아니라 대부분 오로지 실력하나 믿고 영화판에 새로 뛰어든 한국형 헐리우드 키드 출신의 신예감독들이었다. 지금은 이미 기대주를 넘어 한국영화계를 좌지우지할만큼 성장한 이준익,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김지운, 최동훈 등도 그런 포스를 보이며 등장했던 인물들이고 작년에는 나홍진 감독이 추격자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을 또한번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제주도 출신의 역시 이름모를 감독 강형철이 그 주인공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수많은 시련과 고초속에서 자신의 내공을 갈고 닦아 당 영화 '과속스캔들'을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기가 막히게 담아 냄으로써 나와 같은 무지몽매한 영화팬들을 기분좋게 뒤통수 치는데 멋드러지게 성공한 또 하나의 케이스다. 모름지기 좋은 영화의 탄생은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에 달려 있다. 과속스캔들의 성공요인은 생각보다 많겠지만 강형철 감독의 공을 빼놓고서는 거론될 수 없는 곁가지일 뿐이다.

 

 

당 영화는 신선한 발상이 담긴 멋진 시나리오, 물 흐르듯 전개되는 세련된 연출, 주요 캐릭터와 기가 막히게 매치되는 완벽에 가까운 캐스팅, 음악과 미술의 절묘한 활용을 통한 오감만족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재미와 감동이라는 양수겹장의 성과를 거두는데 성공하고 있고 그 중심에 감독 강형철의 일사분란한 진두진휘의 힘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오버해서 말하자면 한국영화가 승부해야 할 영화의 흐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서 또 한번 확실히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영화계 타짜 리스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려놓아도 좋다라는 말로 강감독에 대한 예찬을 갈음할까 한다.

 

 

감독의 역량은 캐스팅에서부터 결정된다

 

당 영화 최고의 무기는 차태현을 포함한 박보영, 왕석현 등의 주연급 라인업의 완벽한 캐스팅외에도 특별출연한 주연급 조연 성지루, 황기동의 유치원 선생님 역의 황우슬혜, 황정남의 첫사랑 역의 임지규, 봉기자 역의 감초전문 연기자 임승대 등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캐스팅 조합이다. 다소 길어질 수도 있지만 왜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훌륭한 캐스팅이라고 주장하는지 조근조근 살펴보자.

 

 

'엽기적인 그녀'에서의 포스를 되찾은 배우 차태현

 

과속스캔들의 흥행소식을 들으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차태현 빼고 다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관람하기 전에 이미 차태현 마이너스 효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애썼는데 결과적으로 부질없는 짓이었음이 드러났다. 당 영화에서의 남현수역은 차태현이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이 정도의 흥행성적과 완성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차태현 최고의 작품은 당연하게도 '엽기적인 그녀'다. 불행히도 그는 이 작품 이후에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배우로서의 자기다움을 뽐낼만한 후속작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유사캐릭터만 싫증날 정도로 반복함으로써 연기자로서 퇴보와 안주를 거듭해 왔을 뿐이다.

 

 

생각보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자 중심인 인기잃은 가수이자 바람둥이 DJ 남현수라는 캐릭터는 쉽게 연기하기 어려운 복잡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쏟아진 소나기처럼 2대의 핏줄이 한꺼번에 자신의 삶에 등장했을때의 황당함과 거부감, 그리고 생존본능에 가까운 현실적인 대응과 더불어 이들을 받아들이고 단절된 부성애를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서슬퍼런 관객의 째림속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만 하니까. 더불어 영화의 중심인물로서 주요 에피소드의 진행과 함께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순수함, 어벙함, 찌질함, 진지함같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의 조화를 통해 담보해 주어야 하는 난제까지 짊어져야 했다 이 말이다.

 

차태현은 위에서 언급한 특이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해낼 수 있는 정말 몇 안되는 배우다. 그리고 당 영화 남현수 역을 통해서 '엽기적인 그녀' 이후에 오랫동안 방황해 왔던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웃음을 만들줄 안다. 동시에 찌질함속에서도 순수함을 내비칠 수 있는 외모와 목소리 톤을 가져서 관객으로부터 무슨 짓을 해도 귀엽고 동정심을 얻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중요한 순간마다 뿜어져 나오는 그의 설익어 보이는 진지함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이 대목에서 배우 차태현에게 격려의 박수 한방 날려주자. 짝짝짝~~

 

 

제 2 의 문근영, 김아중으로 손색없는 끼가 넘치는 배우 박보영

 

위에서 배우 차태현에 대한 개인적인 헌사를 늘어놓긴 했지만 당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캐릭터는 배우 박보영이 분한 황정남이다. 구혜선의 아역으로 잠시 시선을 끌었던 그녀였지만 이토록 매력적이며 끼가 철철 넘쳐 흐르는 배우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의 박보영을 지켜 보면 과연 이게 신인배우가 해낼 수 있는 연기일까 하는 의구심을 넘어 종류가 다른 전율이 느껴진다. 황정남 캐릭터가 처음 등장하는 전화씬과 상봉씬에서부터 관객은 이 개성넘치며 야무지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에 홀딱 빠져들 수 밖에 없다.

 

 

그닥 도덕과 윤리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책임의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남현수가 조금은 영화스럽게 개과천선(?)할 수 있는 설득력의 대부분은 박보영이 창조해 낸 황정남 캐릭터의 매력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버림받은 자식으로서의 한과 반항심으로만 똘똘 뭉쳐있고, 어린나이에 미혼모가 된 탓에 비뚤어지고 책임의식 전무에 잘나가나는 아버지에게 기댈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으며, 매력과 재능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그저 그런 현실에 가까운 캐릭터였다면 남현수는 천륜을 기꺼이 어기면서 자신의 핏줄들을 내쳤을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어떤 영화관련 프로그램에서 당 영화의 흥행요소로 여배우가 노래를 불렀다는 점을 꼽는걸 본 적이 있는데 타당한 지적이다. 박보영은 문근영이 '어린신부'에서 보여주었던 귀여운 퍼포먼스를 가배얍게 뛰어넘고 김아중이 '미녀는 괴로워'에서 보여주었던 프로에 가까운 노래실력에도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여기에 박보영의 퍼포먼스에는 나이답지 않은 분위기와 더불어 상큼함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음반관계자들의 강력한 러브콜이 한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조만간 내 블로그에도 당 영화의 OST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보리라..^^

 

 

한국영화계가 발굴한 또 하나의 천재 아역배우 왕석현

 

사실상 남현수와 황정남을 이어주는 고리이자 결정적 갈등해결 키로서의 황기동 캐릭터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남현수는 황정남보다 황기동에게서 더욱 자신의 DNA 흔적을 쉽게 발견하게 되고 이 엉뚱한 존재를 새로운 연애전선의 스파이로 아낌없이 써먹는다. 황기동은 기본적으로 눈치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만큼 빠릿한 녀석이고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실력과 고스톱치기라는 영화적 포장까지 감안해 보면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매력덩어리다. 왕석현은 감독이 기대했던 것에 비추어 200%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과속스캔들 흥행에 크게 기여한 삼두마차의 한 축으로 손색이 없다.

 

혹자는 실제로 왕석현이 배우 차태현과 친인척 관계가 틀림없다고 확신하던데 현재까지 들리는 소식으로는 전혀 근거없는 바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싸한 추측이 돌만큼 차태현과 왕석현은 분위기나 외모면에서 닮은 구석이 많다. 특히나 새로 들어가게 될 유치원에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운명적 존재앞에서 뻑이 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더욱 더 두 사람이 패밀리라는 사실을 믿어의심치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황기동 최고의 연기가 빛나는 순간을 잠깐 복기해 보자. 고스톱 실력이 확연히 딸림을 실감한 찌질한 할아버지 남현수가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뻔한 비전절기 결정적 패 감추기를 시도하다가 걸리는 순간, 황기동이 보여준 찌질스러움에 대한 다목적 썩소와 한마디는 도저히 보통아이에게서 나올 수 없는 엽기적인 연기력이다. 이 대목에서 모든 관객들이 뒤집어졌고 앞으로도 누구도 예외없이 왕석현의 천재스러움을 인정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신선함과 농익은 조연자들의 결합 - 황우슬혜/임지규 VS 성지루/임승대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발굴한 매력적인 신인이 있었으니 남현수의 새로운 사랑이자 황기동의 유치원 선생님 역의 황우슬혜다. 그녀는 감독의 전략적인 캐스팅이 빛나는 케이스로서 청초한 이미지와 우아함의 대명사 배우 이영애와 이응경을 완벽하게 합쳐놓은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당 영화에서 감독이 기대했던 캐릭터로 분하기에 딱인 외모와 음성 그리고 미소를 보여준다. 당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배우로서 성장하는데 마이너스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매우 많은 영화에서 여전히 많은 수요가 있는만큼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풋풋하고 사리분별 없이 순수한 감정하나로만 좌충우돌하는 황정남의 첫사랑 역으로 분한 임지규는 맡은바 임무를 더도 덜도 없이 충실히 해낸다. 신인티가 가장 많이 나는 배우였지만 지나칠 정도로 아우라가 남다른 캐릭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균형을 잡아주었다는 면에서 칭찬해 주고 싶다.

 

 

특별출연했다는 성지루는 그냥 중심조연으로만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감초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스타의 연인과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성지루는 웬지 지나치게 튄다는 느낌이 있는데 개성이 장점으로 작용하는 영화속에서 그는 더욱 빛난다. 시니컬하지만 정감넘치는 수의사이자 과거 대학가요제 출신 드러머로 분한 성지루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농익은 연기를 통해 등장할때마다 넉넉한 웃음을 선물한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수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감초역할을 보여준 임승대는 적은 출연비중에도 불구하고 얍삽한 연예기자 봉필중 기자역을 충분히 얄밉게 소화해낸다. 극 중 남현수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포스를 느끼게 할 수 밖에 없는 봉기자는 톱스타에게 얻어맞을때조차 관객들이 동정은커녕 대리만족을 느낄만큼 충분히 미운 감정을 몇 안되는 장면을 통해 조성해 해는 힘을 보여준다.

 

 

 

과속스캔들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당 영화가 설정한 매우 극단적이며 이례적인 관계구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관계의 형성, 관계 맺기, 갈등과 상처 극복하기, 그리고 다시 깊어지기 등이 그것이다. 관계에는 상대와 사연이 있기 마련이고 성숙된 관계로 가기 위해 갈등과 상처 그리고 오해는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지혜롭고 아름답게 풀어갈 수 있는 힘은 사랑, 관심, 용기, 이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게다.

 

또한 관계가 지속되는 힘은 정이고 추억이다.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일을 매개로 관계가 형성되긴 하지만 진정한 관계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대낌을 통해서 정이 쌓이고 추억이 만들어져야 함을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 서로가 느끼는 감정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관계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느끼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나의 고객들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한건 당 영화가 준 감동이 그저 영화속 이야기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 나는 현실속의 관계안에서 내가 그동안 소홀했던 사랑, 관심, 이해를 되살리고 관계의 위기를 불러 일으킬만한 갈등, 오해, 상처가 더 곪기전에 먼저 용기내어 치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세상이 아름답고 풍성한 관계로 넘쳐 흐르는 그날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