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토피아

베토벤 바이러스, 스킨쉽도 이쯤이면 예술이다

재능세공사 2008. 11. 7. 14:15

스킨쉽도 이쯤이면 예술이다

 

어제 베바를 보면서 느꼈던 단 하나의 단어는 '스킨쉽'이다. 어떤 미려한 수사로도 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입체적 감정을 스킨쉽만큼 담기 좋은게 또 있을까. 더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찾아간 두루미에게 강마에는 물리적으로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간 직접 전달하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마법과 같은 스킨쉽을 통해 표현한다. 사람들간에 존재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스킨쉽을 접해봤지만 이렇게도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사랑표현은 처음이다. 말 그대로 이쯤이면 스킨쉽도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팔짱 하나 끼는것에도 경기를 일으켰던 이전의 강마에를 떠올려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적극적인 애정표현인 셈이다. 이순간만큼은 두루미의 팔과 손은 오롯이 그녀의 모든 것이 된다. 그 찰나지간동안 두 사람이 나누는 무언의 교감속에 처음 만날때부터 지금까지 쌓아왔던 설레임, 외로움, 따뜻한 위로, 이별의 아픔, 나누고 싶었던 울림 등이 빛의 속도로 휘몰아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감정이 교차될때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으로 가득차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키스나 섹스보다 더 아련하고 가슴 떨리는 스킨쉽이 존재할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두루미의 팔에서 손으로 흘러 내려가는 그의 결연하지만 따뜻한 손길, 그녀의 손마디 마디를 그렇게도 소중하게 위무하고 강렬하게 쥐어 잡으며 단 한 톨의 감정과 느낌도 흘려 보내지 않으려는 한 남자의 마음이 느껴져 시종일관 떨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그녀를 직접 쳐다보면 이 소중한 느낌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 처럼 이 사내는 시종일관 허공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또 다른 입체적인 이미지의 두루미가 가득차 있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의 절절한 마음을 느끼면서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속절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가 더는 아파하지 않기를, 자신의 기대만큼 남들처럼 사랑해주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음을,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가 알아주기를 염원하지 않았을까. 그동안의 가슴앓이로 인한 사랑의 아픔이 이렇게도 따뜻하게 어루만져지고 가슴벅찬 설레임으로 채워질 수 있는 이 순간을 그녀 역시 한올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도 다시금 찾아올 빈자리와 외로움의 순간을 직감하고 있기에 이 순간의 느낌이 더욱 소중할 수 밖에 없다.

 

 

꿈과 현실은 멀리 있지 않다. 

 

그는 꿈을 꾼다. 어떤 속박과 감정의 혼란없이 그가 품고 싶어하는 연인과 제자 그리고 단원들과 환한 웃음으로 어울리는 행복한 모습을. 그가 사랑해온 음악의 선율속에 그려지는 그만의 유토피아안에서 사람들과 강마에는 마냥 행복하다. 현실이라는 괴물도 실력과 경력이라는 허울도 그들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으며 자신을 힘들게 했던 책임의 무게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그들의 순수한 교감을 방해할 세속적인 잣대도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강마에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아파하는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 공연기회 자체를 잃었음에도 그에게 감사할 줄 단원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고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자신걱정에 여념이 없는 연인에게는 최소한의 스킨쉽을 통해 소극적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제자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마음을 써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제자를 안아주며 위로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강마에는 더 많이 주고 싶어하지만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항상 주는데 있는게 아니라 자기일처럼 아파하고 기뻐하고 격려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가 꿈꾸는 미래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항상 행복하기만 할 수도 없지만 시련과 아픔이 있어 그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도 언젠가 실감할 날이 올 것이다.

 

 

포옹 그 알싸한 스킨쉽의 힘

 

박혁권의 아내는 그토록 자신이 혼자 감당하고 싶었던 현실의 무게앞에 감정이 폭발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퍼붓는 날선 오열은 그녀 가정을 위태롭게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일 뿐이다. 그런 아내의 속깊은 심경을 알기에 남편은 그렇게도 모질게 붙들고 있던 자신의 꿈을 버릴 수 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또 한번 가슴 아파하고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그런 사랑이 담긴 포옹이 있는한 부부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시련은 그들의 포옹을 더 짙고 깊게 만들것이고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현실과 더 지혜롭게 싸워나가게 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포옹은 아름다웠다. 진정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포옹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독설의 대가 강마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흔치 않은 제자에 대한 인정과 위로가 거짓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분명 어색하지만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을 리틀 강건우는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누군가 우리의 따뜻한 포옹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그에게 다가가 그 어떤 말보다 마음이 담긴 포옹을 해주자. 혼자가 아님을, 그의 아픔과 기쁨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소박한 진실을 알려주자.

 

 

강마에가 알려준 음악과 교감하는 스킨쉽의 힘

 

강마에를 굴복시키고 시향을 없애려는 시장에게 강마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그의 음악에 대한 무지를 경멸하고 야유하기 위함이었을까. 그가 이미 고백했듯이 음악조차 정치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에게 승리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강마에는 비록 가능성이 적을지라도 그런 시장에게도 그만의 특별한 퍼포먼스를 통해 음악이 담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음악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그렇게도 다양하고 깊을 수 있다는 사실앞에서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장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선택이 자신을 굴복시키거나 지위를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아름다운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시민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임을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장은 모욕감이 더 크게 느꼈겠지만 강마에가 던진 메시지를 자신의 마음속 깊은 내면에서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는지 실감하고 당혹해 하는 시장의 표정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베바를 통해 우리는 꿈, 재능, 자기다움의 소중함을 배우기도 하지만 우리가 창조한 위대한 신의 선물 음악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강마에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자신의 오감이라는 안테나를 한껏 예리하게 세우고 음악을 접하게 된다면 그안에 담긴 영혼의 목소리와 감정을 최대한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당신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삶이 전해주는 음악에 귀기울여 보자. 그속에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더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마음껏 느껴보자. 그리고 그 충만함을 평소에 쉽게 하지 못했던 사랑의 스킨쉽으로 전환시켜 사랑하는 이들과 기꺼이 나누어 보자.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