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토피아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위기감사이에서

재능세공사 2009. 10. 12. 19:44

이것이 현실이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자신의 신념에 찬 행동 하나에도 이런 서글픈 고뇌속에서 아파하고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자신의 앞날에 불온한 기운이 드리워질 것을 알면서도 미련할 정도로 예정된 가시밭길을 선택해야 하는 암울한 세상인 것이다. 혹독한 시련과 난관에 아무런 고뇌도 없이 이겨낼 수 있는 특별히 영웅적인 개인은 없다. 탁현민의 말처럼 '여럿이 함께'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고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며 우리가 꿈꾸는 '사람사는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가는 방법뿐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고 그런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알량한 몇 줄의 메시지로 그에게 힘을 보탤 수 밖에 없는 내 마음을 그가 읽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노무현재단 창립축하 공연 'Power to the People'

연출자가 관객과 시민들에게 드리는 고백

 

탁현민(공연연출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공연을 부탁해온 노무현재단의 양정철 사무처장에게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추모공연 '다시 바람이분다'를 연출하고 안장식 추모문화제' 잘가오 그대'를 거들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위협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 구체적인 위협이 나뿐 아니라 내가 연출한 공연의 출연진에게 더욱 비열하게 자행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 나는 두려웠다.

이제 겨우 자리잡아가는 알량한 연출가의 이력에 친노니 좌빨이니 진보니 하는 빨간 줄이 그어질까 두려웠다. 박원순이나, 진중권이나 아니 윤도현이나, 김제동조차 한방에 날려보내는 저들의 비열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이 무서웠다.
처음에는 뭐 그깟 공연하나 연출한다고 그리 대단한 위협이 있을까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익명의 촛불집회 참석자들까지도 색출해내는 저 놀라운 수사력과 연예인들의 사회적 발언조차 틀어막으려는 노력, 이유 없이 취소되는 몇 건의 공연계약과, 아예 대놓고 "이제 같이 일하시기 어렵겠네요"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버젓이 자행된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출연을 약속하고 번복했던 가수와, 있지도 않은 일정을 핑계로 고사했던 또 다른 가수들, 오랜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정말 나갈 수 없다며 미안해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다고, 그저 공연 한번일 뿐 이라고, 너희의 음악적 지향과 맞는 공연이며, 이 정도의 사회적 참여도 못하면 뭐 하러 음악 하냐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실망도, 배신감도 적잖게 느꼈었지만. 그러한 두려움이 막상 나에게 현실로 닥쳐오니 나는 무서웠다.


무서운 이유는 분명했다

 

그것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불안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엔 매스미디어가 나를 묻고, 가수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게 되면 공연연출가로서의 삶도 그것을 가르치는 일도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나는 공연을 연출했다. 이는 대단한 결단이 있어서가 아니라, 두렵고 무서워서 피하고 싶었으나, 결국 피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다시 공연을 맡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비록 수는 적지만 더욱 담대해진 출연진들 때문이었다. YB와 강산에, 김제동은 누구보다 먼저 출연을 약속하며 나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의 결단으로 드디어 공연은 준비될 수 있었다. 여기에 이제 막 시작하는 노무현재단 관계자들의 헌신은, 차마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밤낮 없이 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든 노무현대통령의 꿈꾸던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이들이 보여준 것은,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처절함이 아니라 새로운 꿈으로 충만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은 결국 관객이었다. 다시 바람이 분다 공연과 추모 문화제 행사에서 만났던 그 관객들은, 결국 내게 또 한 번의 공연을 만들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들을 기억하며 내가 만일 이번 공연으로 경제적 사회적 안락함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조금 잃는 것이고, 이제부터 나와 공연을 하는 것을 꺼려하는 가수가 생긴다면 그보다 좀 더 잃는 것이겠지만, 이전의 공연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그 관객들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다 잃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 노래했던 가수들이 상대적으로 적고, 유시민, 정연주, 조기숙, 이재정, 문성근, 장하진 등 재단 관계자들로 하이라이트를 구성하고, 무엇보다 시민들이 공연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맡은 이유가 다 여기에 있음을 밝혀둔다. 결국 연출가의 의도에 앞서 이번 공연은 애초부터 모두가 함께 만들 수밖에는 없었던 공연이었다.


 

이제 공연은 끝났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겨내는 방법이 무엇일지 알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혹은 막연하게 다가오는 이 불온한 바람. 여기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

그것은 다름 아닌 '여럿이 함께' 가는 것이다.

추모공연과 재단 출범 공연을 연출하면서, 변하지 않고 무대 위에 서는 가수들도, 흐트러지지 않는 재단의 관계자들도, 또한 언제나 이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도, 이제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존재가 되었음을 느낀다.

혹여 우리가 가려는 길이 두렵고 무서워서 피하고 싶지만, 그러나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서로의 든든한 어깨가 되었음을 뜨겁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