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토피아

'다단계'에 얽힌 몇가지 기억

재능세공사 2008. 9. 16. 18:07

'좋은 알바 있는데..', '대학생 다단계' 노출 심각 이라는 기사를 봤다. 한동안 잠잠한 듯 보였던 다단계의 폐해가 여전히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문득 다단계에 얽힌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다.

 

 

기억 하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앗아가다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또래 동창들과의 어울림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던 나의 첫사랑 그녀에게서 1년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묘한 매력을 가진 활동적인 그녀는 인기가 많았고 나는 그녀를 좋아했었다. 몇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고 싶어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소리소문도 없이 내곁을 떠나갔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러 갔다. 반가워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 믿지?" 정확히 무슨 의미로 하는 얘기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일어섰다.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노래를 기계적으로 불러대고 있었고 언뜻 종교행사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 무리에 섞여 앉아 그들이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이벤트를 끝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굉장히 좋은 일이고 내가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단 참여하려면 얼마간의 돈을 먼저 내야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다단계업체인 줄도 몰랐지만 무언가 잘못된 일에 그녀가 빠져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나에게 연락한 이유가 단지 업무적(?)인 이유때문이라는 사실에 섭섭하고 화가 났다.

 

그렇게 그녀와의 재회는 기분나쁘게 끝났다. 그녀의 매력과 활동성이 그런 용도로 쓰여지는게 서글펐다. 나 외에도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모두에게 그녀는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좀 더 적극적으로 그녀를 설득해서 그만두게 하지 못했는지 아쉬울 뿐이다.

 

 

기억 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다단계의 유혹

 

첫사랑과의 불쾌한 기억을 잊어갈 무렵, 다단계와 얽힌 일들이 내주변 여기저기서 다시 일어났다. 대학교때 친했던 선배의 광적인 참여 권유, 작은 형의 베스트 프렌드가 다단계 때문에 빚쟁이가 되고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이야기, 골프 티칭 프로에 체육교사였던 대학원 친구와의 암웨이 참여에 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다단계의 그림자는 광범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다단계에 자의든 타의든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보통의 월급쟁이와는 비교도 안될 엄청난 수입을 얻게된다는 환상이 첫번째고 지인들이나 가족들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알게해 주고 참여시켜야 하는 좋은 사업이라고 철썩같이 믿는다는게 두번째다.

 

 

이 말도 안되는 믿음을 가능케 하기 위해 교육이나 설명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단계 업체의 세뇌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묘한 인센티브 로직과 이미 성공의 반열에 올라있는 상위그룹의 놀라운 수입과 환상적인 생활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에 어느 정도 노출되다 보면 흔들리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미 조직에 참여한 중심인물들의 화려한 언변과 카리스마, 살가움 등이 인간적인 매력으로 작용하면서 감정적인 묻지마 신뢰감을 조성한다는 사실이다.

 

 

옛 상사 한분은 암웨이 총회같은 곳에 다녀온 경험을 떠올리며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를 떠나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암웨이식 계급(다이아몬드,에머랄드 등)에 따라 딱 그만큼의 카리스마를 기계적으로 발휘한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개개인의 인성이 보이지 않고 인센티브 계급에 따라 계획적으로 생산해 낸 설득의 달인들만이 보였다는 얘기다. 섬�하지 않은가. 

 

 

사람간의 정과 신뢰는 팔 대상이 아니다

 

혹자는 다단계와 네트웍마케팅의 차이를 논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람간의 정과 신뢰를 노골적인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위험한건 매한가지다. 가장 성공한 다단계판매업체 암웨이는 유형적인 인센티브 로직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총아같은 기업이다. 그들은 환경친화적인 생산을 이야기하고 조직원들의 공헌에 따라 공정한 배분을 외치지만 결국은 사람들의 정과 신뢰를 '자본화' 시키는데 앞장서는 첨병일 뿐이다.

 

 

그들이 개발한 다단계마케팅 논리는 수많은 돌연변이를 만들어 냈고 사람들을 속이는데 활용됐다. 게다가 공정한 로직이란 따지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들어 낸 특별한 소수의 성공이라는 환상은 불공정 로직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위그룹이 만들어 낸 수입을 어떤 비율로든 그 그룹을 조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상위 그룹이 더 가져가는 로직이 존재하는 한 최하위 그룹의 끊임없는 희생을 계속 만들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 말 그대로 희생자가 또 다른 희생자를 먹이로 삼아야 하는 악순환을 구조적으로 야기하는 악마같은 로직인 것이다.

 

 

이 구조에서 이탈하는 순간, 유형적인 인센티브로 무장한 조직안에서의 관계는 파멸에 이른다. 누가 희생자였음을 깨닫기 때문이고 그 수렁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워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좋아했던 사람이 그의 수입을 위해 자신을 하위그룹으로 끌어들이고 더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도록 독려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면 경제적인 불이익을 떠나 인간관계 자체에 회의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상품도 없이 가입금만으로 사기를 치는 다단계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간의 정과 신뢰는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도 없을 뿐더러 한번 잃으면 되돌이킬 수 없다. 이 소중한 관계의 의미를 돈을 버는데 활용하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다단계마케팅이 더이상 우리곁에 얼쩡거리지 못하도록 모두가 노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